
6.25전쟁 전쟁의 결과
◈ 6.25전쟁 전쟁의 결과 ◈
● 6.25 전쟁에서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도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전쟁피해를 입었으며 군사작전으로 인한 1차적 전쟁피해와 이념투쟁에 의한 2차적 피해가 중첩되었습니다. 핵무기를 제외한 최신 살상무기가 좁은 전장에 동원됨으로써 살상력을 더하였습니다.
● 우선 인명피해에 있어, 한국군(경찰 포함) 63만 명, 유엔군 15만 명을 포함 78만 명이 전사·전상·실종되었으며 북한군 80만 명, 중공군 123만 명 등 약 203만 명의 손실이 생겨 군인피해만도 총 281만 명에 달하였습니다. 또한 1952년 3월 15일까지 발생된 전재민의 수가 천만 명을 넘었습니다.
● 휴전 때까지 이 숫자는 훨씬 늘어났겠지만 결과적으로 전체인구의 1/2 이상이 전화를 입게 되고 피해를 입지 않은 가족이 없었으며 전 · 사상자의 혈육과 이산가족 등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6.25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물적 피해도 인명피해 못지않게 컸습니다.
● 부산교두보를 제외한 전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37도선과 38도선 사이의 지역에서는 세 차례의 피탈과 탈환이 반복되었습니다. 남한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2%가 파괴되었고 북한은 1949년 대비 공업의 60%가 파괴가 되었습니다.
● 이런 가운데 개인의 가옥과 재산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을 배롯 해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 철도, 교량, 항만 및 산업시설이 크게 파손되었음은 물론 군사시설로 전용된 학교 및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국민생활의 터전과 사회 · 경제체제의 기반이 황폐화되었습니다.
● 휴전은 '군사행동(적대행위)의 일시적 중지'를 의미하는 순수한 군사적 조치이며 휴전은 종전이 아니라 전쟁과 평화의 가교였습니다. 이에 따라 휴전으로 일단 정전조치를 취하고 휴전체제를 구축한 다음 이를 평화로 대체하기로 하였으며 3개월 내에 정치회담을 열어 평화적 해결방안과 외국군의 철군 등 정치현안을 다루기로 협정하였습니다.
● 그러나 정치회담은 회담 참가국 및 장소문제로 인해 판문점 예비회담에서 좌초되어 본회담은 협상에 명시된 3개월 내에 열리지도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이듬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문제를 다루던 미 · 소 · 영 · 불 4개국 외상회담의 주선으로 1954년 4월 26일 뒤늦게 정치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렸습니다.
● 여기에서 통일정부 수립방안에 있어 자유선거 방식과 유엔감시를 둘러싸고 타협의 자세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6월 15일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쌍방은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 시 켜거나 남북통일로 승화시키는데 실패하고 불안한 휴전상태로 대치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 휴전협정의 이행관리 및 감독기능이 마비되어 휴전이 언제 열전으로 바뀔지 예측을 불허하는 현국이 되어 버렸으며 전후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한 강인한 정신력으로 인고의 한 세대를 지내게 됨으로써 그것이 곧 복구와 재건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6.25 전쟁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전쟁의 억지는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만이 가능하며 한반도 통일도 평화적인 수단으로 성취해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6.25 전쟁은 현재 우리에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많은 과제가 남겨져 있습니다.
● 아울러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무엇보다 민족적인 우선 과제로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의 전환하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다고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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