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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정보/6.25전쟁

6.25전쟁 (1950년 10월 19일 ~ 1951년 7월 9일) 4탄

by 피어리어스 2023.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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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제3단계(1950년 10월 19일 ~ 1951년 7월 9일)

 
▣ 6.25 전쟁 제3단계(1950년 10월 19일 ~ 1951년 7월 9일) ▣
 
● 중국은 유엔군의 38도선 북상을 확인한 직후 몇 차례 소련 및 북한과 논의한 후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라는 목표로 최종 참전을 결정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1950년 10월 19일 팽덕회 지휘하의 제13 병단 26만여 명의 병력이 압록강 3개 지점을 거쳐 입북하였습니다.
 
● 6.25 전쟁은 조 · 중 연합군 대 유엔군의 전쟁, 사실상 중공군대 유엔군의 전쟁으로 바뀌었으며 전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의 군사지원등을 고려하면 전쟁의 상황은 냉전구조 하의 공산진영 대 자유진영의 전쟁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중공군은 10월 25일 유엔군이 박청-운산-온정리-희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1차 공세(1950년 10월 25일 ~ 11월 7일)를 개시하였습니다. 중공군은 대부대를 투입하여 유엔 군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하여 은밀히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한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제6사단 선두부대가 압록강변 초산을 점령하였고 서부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고 있었습니다.
 
●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과 불의의 조우로 인하여 후방이 차단된 상황에서 위기를 맞았으나 이때 갑자기 중공군이 공격을 멈추고 청천강 북쪽 적유령산맥으로 이동하여 자취를 감춤으로써 일시적으로 정적이 감돌았으며 중공군이 기만전술과 유인전술을 운용한 것이었습니다.
 
●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전황을 오판하여 중공군의 참전목적과 작전기도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제8군의 재공격 준비가 완료되자 '11.24 최종공세'(일명 크리스마스공세)를 명령하였습니다. 이때 전선의 상황은 12개국의 유엔군이 참전 중이었고 정주-영원-장진호-혜산진-합수-청진선을 점령하여 한 · 만 국경선을 지척에 놓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유엔군은 이번에도 중공군의 2차 공세(1950년 11월 25일 ~12월 24일)에 맞부딪쳐 큰 손실을 입었으며 11월 30일을 기하여 모든 부대가 무질서하게 철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엔군은 비로소 중공군이 대대적으로 개입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반격 개시 71일 만에 철수작전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은 12월 4일 평양에서 철수하여 12월 말 38선 부근으로까지 철수하였고 동부전선의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에게 퇴로가 차단되어 부득이 홍남부두에서 부산으로 해상 철수를 하였습니다. 조 · 중 연합군은 몇 차례의 내부적인 갈등을 겪은 후 3차 공세(1950년 12월 31일 ~ 1951년 1월 8일)를 개시하여 38선을 돌파하였습니다.
 
● 사령관 팽덕회는 주력 부대를 의정부-서울 축선으로 향하게 하고 보조 부대를 춘천-원주 축선으로 향하게 하여 총공격을 가하였으며 결국 유엔군은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선까지 철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병참선 신장을 유도하고 유세한 화력으로 중공군 전력을 약화시키며 반격작전을 준비하였습니다.
 
● 중공군의 공세역량이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파악하고 1951년 1월 25일 일제히 반격작전에 나섰으며 1·4 후퇴의 위기를 넘기면서 아군은 37도선에서 간신히 전선의 안정을 기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연속적인 공세에 전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 중공군의 몇 차례 공세를 계기로 한국 국민들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엄숙한 현실을 직시하고 모두가 스스로 들고일어나 힘을 보태려고 했으며 정부는 100만 청년을 무장시켜 중공군을 격퇴시키려 하였고 이관정에서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 중공군은 그 후에 4차, 5차 공세를 무리하게 강행하였으며 유엔군의 반격 직후 4차 공세(1951년 1월 27일 ~ 4월 21)를 단행하여 지평리, 원주 일대에서 많은 손실을 입으면서 격력 한 전투를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전투에서 유엔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회복하여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여세를 몰아 3월 말에 38선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 이어진 중공군의 5차 공세(1951년 4월 22일 ~ 6월 10일)는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최대 병력과 소련으로부터 지원된 최대 규모의 장비를 투입한 마지막 공세였으며 이들은 4월에 서부전선의 개성-화천 방면에 5월에는 동부전선의 양구-인제 방면에 각각 전력을 집중시켜 총공세를 펼쳤습니다.
 
● 유엔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반격을 중단한 것은 전전의 원상복구 상황에서 휴전을 모색하려는 미국의 정치적인 고려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이 무렵 중공군은 공격개시 직후 한계점이 노출되고 미국 역시 내부적으로 정전 압박을 받아 새로운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 유엔군 측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에서 밀리게 되자 1950년 말경부터 내부적으로 정전을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그동안 유엔은 5단계 정전 방안 등 여러 가지 중재안을 제시하였지만 번번이 공산궁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 어느 쪽에서나 위험한 반격보다는 안정적인 봉쇄나 현상유지 정책이 타협안으로써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 전쟁이 시계대전으로 확전 될 위험이 커지자 영국을 비롯한 참전국들 사이에서 전쟁 이전의 원상회복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자는 휴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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